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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2장 1절-7절, 인생의 새벽, 은혜의 밭에서 주님을 만나십시오 - 생명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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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인생의 새벽, 텅 빈 바구니를 들고 선 당신에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19세기 영국 산업혁명 당시의 풍경을 한번 떠올려 보며 말씀을 시작하려 합니다. 자욱한 안개와 공장의 매연이 가득한 거리, 수많은 노동자가 그저 하루의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헤맸습니다. 그들이 정처 없이 걷다가 '우연히' 일자리를 얻게 된 그 골목은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터전이 되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삶의 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노동자들의 절박한 뒷모습보다 더 시리고 아픈, 베들레헴의 한 이방 여인을 마주하게 됩니다. 인생의 가장 추운 겨울을 지나 이제 막 보리 추수가 시작된 베들레헴의 새벽입니다. 룻은 텅 빈 바구니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섭니다. "오늘 하루, 과연 누구의 밭에서 이 바구니를 채울 수 있을까?" 여러분, 이 막막한 질문은 오늘 새벽 제단을 찾는 우리 성도님들의 가슴 속에 맺힌 ' 막막함 '이라는 단어와 참 많이 닮아 있지 않습니까? 새로운 시작을 꿈꾸지만, 당장 발을 내디딜 곳조차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운'이나 '우연' 같은 요행이 찾아오길 기대하곤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가 '우연'이라 부르는 그 모든 순간 속에, 하나님의 정교하고 세밀한 '필연'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론 첫째, 하나님의 섭리는 '우연'이라는 옷을 입고 찾아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정성껏 모시기 위해 이삭을 주우러 나갔습니다. 이방인 여인으로서 차가운 시선과 거친 대우를 온몸으로 견뎌야 하는, 참으로 두려운 발걸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은 아주 놀라운 증언을 합니다. 룻기 2: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여기서 '우연히'를 뜻하는 ...

룻기 1장 15절-22절, 텅 빈 인생을 채우는 하나님의 헤세드 - 생명의 삶 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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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우리 인생에 찾아온 흉년 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역사학자들은 사사 시대를 일컬어 이스라엘의 '암흑기'라고 부르곤 합니다. 영적 기준은 무너졌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방황하던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베들레헴의 한 가족은 극심한 흉년을 피해 이방 땅 모압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현실은 더 참혹했습니다. 십 년 만에 가장과 두 아들을 잃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완벽한 '제로(0)' 상태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처절한 절망의 마이너스 상태였을지도 모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각자의 삶에서 예기치 못한 '인생의 흉년'을 수시로 마주하지 않습니까?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잠을 줄여가며 치열하게 달렸지만, 정작 손에 남은 것은 모래알처럼 빠져나가 버립니다. 반복되는 일상과 깨어진 관계 속에서 몸과 마음은 만성적인 번아웃에 빠지고, "이제는 정말 끝났다"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들이 우리에게도 찾아옵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복음의 역설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철저히 텅 비었을 때' 비로소 당신의 신실한 사랑인 '헤세드'를 채울 공간을 발견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인생의 쓰디쓴 마라의 잔이 어떻게 달콤한 은혜의 잔으로 변화되는지, 그 놀라운 회복의 신비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본론 첫째,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사랑 - 헤세드의 선택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룻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앙 고백 중 하나를 남깁니다. "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 이 선포는 단순히 시어머니를 향한 인간적인 연민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와 문화, 익숙했던 우상과 보장된 미래를 모두 뒤로한 채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자기 투신'입니다. 성경은...

룻기 1장 1절-14절, 인생의 흉년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 - 생명의 삶 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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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인생의 흉년, 어디로 갈 것인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베들레헴’이라는 지명, 그 속에 담긴 아름다운 뜻을 알고 계십니까? 바로 ‘떡집’입니다. 떡집이라면 마땅히 풍성한 곡식이 있고, 갓 구운 빵의 따뜻한 향기가 가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은 참으로 믿기 힘든 역설로 시작됩니다. 풍요의 상징인 떡집에 그만 떡이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흐르는 그 땅에 메마른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종종 이런 당혹스러운 현실을 마주하곤 합니다. ‘예수님 잘 믿고 순종하면 당연히 형통하겠지’라고 기대하며 나아갑니다. 하지만 때로는 믿음의 중심을 지키는 가정에도 예기치 못한 ‘경제적 위기’라는 흉년이 닥칩니다. 간절히 기도해도 ‘질병의 흉년’이 찾아오고, 가장 가깝다고 믿었던 이들과의 ‘관계’에 가뭄이 들기도 합니다. 떡이 있어야 할 베들레헴이 텅 비어버릴 때,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심각한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오늘 설교의 시작을 여는 키워드는 바로 ‘ 이사 ’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직장이나 자녀의 학군, 혹은 더 좋은 환경을 위해 이사를 결정하곤 합니다. 참 합리적인 선택이지요. 하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엘리멜렉 가족의 이사는 조금 달랐습니다. 베들레헴을 떠나 이방 땅 모압으로 향한 그 걸음은, 단순히 주거지를 옮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현실의 결핍을 견디지 못해 하나님이 정해주신 ‘약속의 자리’를 떠나버린 영적 도피였습니다. 눈앞의 배고픔을 해결하려고 약속의 도성을 등지고 이방의 풍요를 선택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의 흉년이라는 딜레마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드시겠습니까, 아니면 손익을 따지며 계산만 하고 있으시겠습니까? 오늘 이 엄중한 질문 앞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첫째, 눈에 보이는 풍요를 쫓는 이방행 가정의 가장이었던 엘리멜렉, 그의 이름에는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위대한 신앙의 ...